김종길칼럼
내용
아침 등산길에서 일이다. 마주 오는 두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무심코 듣게 되었다. 고갈비를 처음으로 먹었는데 그 맛이 어떠하더라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고갈비정식이란 걸 알게되고 맛을 보는데 무려 십 수년이 걸렸던 기억이 살아난다.
이십 년도 전이다. 시내나들이를 갔다가 용두산을 끼고 돌아나가는 좁은 골목길을 걷는데, 돌담에 써있기를 "고갈비정식전문"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로얄호텔의 뒤에 있는 작은 음식점 골목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메뉴여서 호기심이 생겼다. 고갈비라는 이름에는 갈비처럼 맛이 있을 것이란 느낌을 연상시켰다. 마침 식사시간이 아닌데다 갈 길이 바빠 지나쳐버리게 되고 잊혀졌다.
그후에도 한두 해에 한번쯤은 고갈비라는 단어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한번 먹어보았으면 하는 군침을 삼켰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십 년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여러 곳에서 그 메뉴를 보게되었다. 아마도 그 인기가 번져나간 것으로 보였다.
마침내 비록 내가 처음 보았던 원조집은 아니었지만, 어느 작은 식당에서 고갈비라는 메뉴를 보게 되었고, 선뜻 골라잡았다. 실로 십 수년의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상을 받고 보니 갈비 비슷한 것은 없고 양념으로 조리한 고등어 한 마리가 내 앞에 버티고 누워있는 것이다. 아니, 갈비는 어디로 가고?
알고 보니 고등어양념구이를 듣기 좋게 고갈비라고 불렀다. 짭짤한 고기 맛이, 갈비는 못되더라도 어려운 시절의 짠고등어 맛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예전 강원도 내륙지방의 밥상에서 대접받던 고등어였다. 장에서 돌아오는 가난한 농군 아버지들의 지게등짐 모서리에서 달랑거리며 딸려오던 소금저린 고등어 한 손, 그 짠맛이 혀끝에 붙는다.
안동닭갈비라는 메뉴도 요즈음 인기를 끈다는데 이 경우에도 닭갈비는 아니고, 토막낸 닭조림이다. 가치는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경우를 일러 계륵(鷄肋)이라 이른다. 닭갈비의 신통찮은 가치가 갈비라는 느낌으로 위장을 한 모양새다. 고갈비나 계륵이나 한 통속인 셈이다.
언어의 왜곡현상이 눈에 많이 뜨인다. 빌라라고 하는 영어의 원 의미는 고급 저택이라는 개념이나 우리 땅에서 빌라는 그저 그런 아파트일 뿐이다. 가든이라는 단어는 어떤가. 우리 나라 전역이 가든 공화국이라고 빈정거리는 표현도 있는 걸 보면 이 경우도 남용이다. 초보가 왕초보로, 따돌림은 왕따라는 말로 대치되었다. 과포장되거나 남용, 왜곡된 표현들이다. 언어의 인플레 현상은 바로 인지와 사고의 인플레요, 표현의 극대화를 통한 자극의 극대화현상이다. 이를 뒤따르는 현상은 감정의 극적 표현들이며, 체면문화가 가지는 문제점으로 보인다.
오늘의 한국인의 감정 특성 가운데 하나가 "빨리 빨리"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특성이 IT정보화체계에 걸 맞는 면이라고 보겠으나, 정신문화의 성숙과정에서의 원색지향적 역행도 있음을 알게된다. 정신문화가 성숙하면 중간적 파스텔톤의 감정들이 부드럽게 표현된다. 언어도 그렇게 변화되어 갈 것이다. 거친 은어나 사투리가 표준화하는 분위기에서 언어의 세련된 승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세대차에 따른 언어 변화도 심상치 않다. 다소 과장한다면 오빠와 결혼생활을 하는 근친상간의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남편을 오빠라 부르니 코믹하지 아니한가.
고갈비라 하든 고등어조림이라고 하든 같은 식단일 뿐이지만, 산업디자인의 시대에서는 같은 물건이라도 이름과 포장, 약간의 조리기술, 디자인과 같은 변화가 정신에 최면을 걸어 매상고를 좌우한다. 겉모양만 보아서는 속내조차 알 수가 없다. 아파트라고 하면 분양이 안되고, 로얄듀크니 메트로시티 운운하는 격상의 언어로 포장하여야 되는 이 시대에서 살아가는 지혜는 이름을 통해 내용을 짐작해야 하는 심안이 필요해진다.
쎙떽쥐뻬리도 같은 지혜를 말한다 - 어린왕자를 이별하는 여우가 작별사를 이렇게 말한다,
" 잘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여."
어린왕자는 복창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안보여."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하였다. 이 뜻이 바로 겉멋에 치중하여 속힘을 자초하는 겉똑똑이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어서 겉체면을 추방하려던 정신이었을게다. 나이가 들었으면서도 언어의 알맹이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면 나이를 헛 먹은, 미성숙의 나이나 같다. 어른 중에도 의외로 그런 연륜의 사람이 많아 보인다.
과잉보호로 키운 아들이 박사가 되었는데도 직장도 못잡고 카드남용으로 집을 저당 잡히어 고생하는 노부부가 있다. 그들을 보니 키덜트(키드와 아덜트의 합성)가 많아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실감한다. 성숙은 노력 없이 찾아오는 나이와 같은 게 결코 아니다. 나이와 함께 절약과 검약의 정신도 더해질 때 성숙도 농익어 가는 것이리라.
이십 년도 전이다. 시내나들이를 갔다가 용두산을 끼고 돌아나가는 좁은 골목길을 걷는데, 돌담에 써있기를 "고갈비정식전문"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로얄호텔의 뒤에 있는 작은 음식점 골목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메뉴여서 호기심이 생겼다. 고갈비라는 이름에는 갈비처럼 맛이 있을 것이란 느낌을 연상시켰다. 마침 식사시간이 아닌데다 갈 길이 바빠 지나쳐버리게 되고 잊혀졌다.
그후에도 한두 해에 한번쯤은 고갈비라는 단어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한번 먹어보았으면 하는 군침을 삼켰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십 년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여러 곳에서 그 메뉴를 보게되었다. 아마도 그 인기가 번져나간 것으로 보였다.
마침내 비록 내가 처음 보았던 원조집은 아니었지만, 어느 작은 식당에서 고갈비라는 메뉴를 보게 되었고, 선뜻 골라잡았다. 실로 십 수년의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상을 받고 보니 갈비 비슷한 것은 없고 양념으로 조리한 고등어 한 마리가 내 앞에 버티고 누워있는 것이다. 아니, 갈비는 어디로 가고?
알고 보니 고등어양념구이를 듣기 좋게 고갈비라고 불렀다. 짭짤한 고기 맛이, 갈비는 못되더라도 어려운 시절의 짠고등어 맛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예전 강원도 내륙지방의 밥상에서 대접받던 고등어였다. 장에서 돌아오는 가난한 농군 아버지들의 지게등짐 모서리에서 달랑거리며 딸려오던 소금저린 고등어 한 손, 그 짠맛이 혀끝에 붙는다.
안동닭갈비라는 메뉴도 요즈음 인기를 끈다는데 이 경우에도 닭갈비는 아니고, 토막낸 닭조림이다. 가치는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경우를 일러 계륵(鷄肋)이라 이른다. 닭갈비의 신통찮은 가치가 갈비라는 느낌으로 위장을 한 모양새다. 고갈비나 계륵이나 한 통속인 셈이다.
언어의 왜곡현상이 눈에 많이 뜨인다. 빌라라고 하는 영어의 원 의미는 고급 저택이라는 개념이나 우리 땅에서 빌라는 그저 그런 아파트일 뿐이다. 가든이라는 단어는 어떤가. 우리 나라 전역이 가든 공화국이라고 빈정거리는 표현도 있는 걸 보면 이 경우도 남용이다. 초보가 왕초보로, 따돌림은 왕따라는 말로 대치되었다. 과포장되거나 남용, 왜곡된 표현들이다. 언어의 인플레 현상은 바로 인지와 사고의 인플레요, 표현의 극대화를 통한 자극의 극대화현상이다. 이를 뒤따르는 현상은 감정의 극적 표현들이며, 체면문화가 가지는 문제점으로 보인다.
오늘의 한국인의 감정 특성 가운데 하나가 "빨리 빨리"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특성이 IT정보화체계에 걸 맞는 면이라고 보겠으나, 정신문화의 성숙과정에서의 원색지향적 역행도 있음을 알게된다. 정신문화가 성숙하면 중간적 파스텔톤의 감정들이 부드럽게 표현된다. 언어도 그렇게 변화되어 갈 것이다. 거친 은어나 사투리가 표준화하는 분위기에서 언어의 세련된 승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세대차에 따른 언어 변화도 심상치 않다. 다소 과장한다면 오빠와 결혼생활을 하는 근친상간의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남편을 오빠라 부르니 코믹하지 아니한가.
고갈비라 하든 고등어조림이라고 하든 같은 식단일 뿐이지만, 산업디자인의 시대에서는 같은 물건이라도 이름과 포장, 약간의 조리기술, 디자인과 같은 변화가 정신에 최면을 걸어 매상고를 좌우한다. 겉모양만 보아서는 속내조차 알 수가 없다. 아파트라고 하면 분양이 안되고, 로얄듀크니 메트로시티 운운하는 격상의 언어로 포장하여야 되는 이 시대에서 살아가는 지혜는 이름을 통해 내용을 짐작해야 하는 심안이 필요해진다.
쎙떽쥐뻬리도 같은 지혜를 말한다 - 어린왕자를 이별하는 여우가 작별사를 이렇게 말한다,
" 잘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여."
어린왕자는 복창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안보여."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하였다. 이 뜻이 바로 겉멋에 치중하여 속힘을 자초하는 겉똑똑이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어서 겉체면을 추방하려던 정신이었을게다. 나이가 들었으면서도 언어의 알맹이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면 나이를 헛 먹은, 미성숙의 나이나 같다. 어른 중에도 의외로 그런 연륜의 사람이 많아 보인다.
과잉보호로 키운 아들이 박사가 되었는데도 직장도 못잡고 카드남용으로 집을 저당 잡히어 고생하는 노부부가 있다. 그들을 보니 키덜트(키드와 아덜트의 합성)가 많아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실감한다. 성숙은 노력 없이 찾아오는 나이와 같은 게 결코 아니다. 나이와 함께 절약과 검약의 정신도 더해질 때 성숙도 농익어 가는 것이리라.
0
0
권한이 없습니다.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