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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칼럼

제목

와자송(올챙이 찬미 노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2.19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4692
내용
와자송 蛙子頌
김 종 길

자그만 웅덩이에 와자들이 우굴거린다. ‘우물 안 개구리’ 뜻을 모를 사람은 없을 일이다. 그러나 와자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터. 우리말로 ‘올챙이’ 하면 그걸 왜 몰라, 와자蛙子가 바로 올챙이다. 요즘엔 가까운 시골에서조차 와자 구경이 쉽지 않다.

어느 찌는 여름날 오후에 와자옹翁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가 오는 날이면 내 진료실이 조용하다. 잊혀질만 하면 한번 씩 찾아와 즐거운 너스레를 나누다 돌아가는 정 많은 친구, 와자옹은 내가 부르는 이름이요 그는 스스로 와자라고 한다. 그와의 화제는 언제나 평범치 않은 주제들이다. ‘어제 내가 보낸 멜을 봤소?’ ‘아니요.’ ‘거참 이상하네.’ 다음날 아침에 확인하니 스팸으로 들어와 있다. 편지를 열었더니 난데없이 생명론이다. 생명의 오묘한 순간, 우주의 섭리를 그림으로 그렸다고 말했는데, 그 그림이 열린다. 와우, 멋진 심상화心象畵를 그렸네. 와자옹은 보통내기 화백이 아니다. 언젠가 칭하이스님의 선도禪道그림전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보다 격이 높다. 그의 편지를 음미해 본다.

“조금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이름 모를 새들이 이 이른 아침에 노래하네요. 분명 그 무슨 사연인지? ... 탄생이란 화제를 앞에 놓고, 생명이란 균형과 조화와 질서위에 사랑의 섭리로 탄생한다는 것을 표현해보려 하였으나, 안계관념眼界觀念의 한계限界를 벗어나지 못한 유치한 맹자盲者의 황荒칠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에 그는 좀 괴짜임에 틀림없다. 원래 공학도인데 잘 하던 회사를 접더니 화가로 변신하였다. 물론 나이도 은퇴에 이르렀으나 절대 은퇴를 모르는 생활이다. 돈을 탐하는 그림은 분명 아니다. 물감의 화학적 특성을 이용한 번짐을 이용하는 아름답고 묘한 분위기를 살리는 수채화를 그린다. 작고한 부친께서도 유사한 풍의 수채화를 하셨는데 국내보다도 외국에서 더 인정받는 작가였다. 얼마 전에는 유명을 달리한 고명한 아버지 화백과 화업을 이은 아들간의 부자전父子展에도 초대 받은 정도이니 기반을 확고히 잡은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온라인 갤러리에 들어가면 경지에 이른 선화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그는 컴퓨터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일상생활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의학기구를 발명하였다. 홍채 안을 보는 진찰기, 홍채경을 발명하였다. 제 1호기를 내가 구입하였는데 임상에 이용은 못하고 있으나 유용하게 이용될 날이 올 것이다.

그와의 교류가 삼십년이 되는데 그의 나이를 안 것은 십년이 안 된다. 나이를 듣고서 깜짝 놀랐으니 갑장인 줄 알았는데 십년이나 연상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결례가 너무나 송구스러웠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와자옹 왈, “당신, 올챙인 거 알아요?” 느닷없이 던지는 질문, 얼핏 생각하면 기분 나쁜데 원래 범상치 않은 질문을 잘 던지니까 무슨 뜻이 있겠거니 미소로 답하자 그가 설명을 붙인다. 그 질문은 사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와자라고 호를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실은 우물 안 개구리들이라는 이야기이다. 자기도 한계 안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 와자가 아니겠느냐는 반문적 사뭇 희화적 조롱이다.

그의 말에 한 세계적 석학인 지인이 던진 질문들이 떠오른다. 차기 국제유기물리학회 의장이기도 한 그의 말은 장난기가 넘친다. ‘지구 도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요?’ ‘개미가 걸어가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요?’ 물론 함께 술을 마시던 좌중은 모두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이 기발한 사람들은 엉뚱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박사호號를 가진 나라고 별 수 없다. 개미가 걸어가는 소리라니, 상상도 못했으니. 다만 탄복을 하며 들었을 뿐이다. 어떤 분이 불가에서 외는 기도 소리 ‘옴메니반메흠~’에서 ‘옴’이 바로 지구가 도는 소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구 도는 소리도 개미 걷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우매한 세상 사람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집착한다. 실제로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현상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말이다.

환자는 아프다고 하고 검사결과는 이상이 없을 때, 의사들은 데이터에 집착하고 눈에 안 보이는 정신세계를 외면하는 현실이다. 알아도 해줄 게 없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환자가 그걸 몰라서?! 그냥 ‘힘들겠네요.’ 공감만 해줘도 될 일이건만...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말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많다. 밝혀진 게 많아도 아직 보이는 것의 한계 밖이다. 그래서 지금 아무리 잘 아는 의원이라 할지라도 계속 한계 밖이다. 게다가 세상의 흐름이 하도 빠르니 그 변화에 따르기 힘들다. 스스로 ‘와자’라는 호를 붙인 의도가 충분히 공감된다. 어찌 그와 나만의 문제일 뿐이랴.
‘당신, 올챙이인 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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