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칼럼
내용
지금부터 반 세기 전에 씌여진 내용이나 현세에도 아직도 적용되는
작가의 인간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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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급 품
金 素 雲 *
일어로 '가야'라는 나무- 자전에는 '비(榧)'라고 했으니 우리말로 비자나무라는 것이 아닐까....... 이 가야로 여섯 치, 게다가 연륜이 고르기만 하면 바둑판으로 그만이다.
오동으로 사방을 짜고 속이 빈- 졸을 놓을 때마다 떵! 떵! 하고 울리는 우리네 바둑판이 아니라, 이건 일본식 바둑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야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2, 3국을 두고 나면 반면이 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동안만 그냥 내버려두면 반면(盤面)은 다시 본대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가야반의 특징이다.
가야를 반재(盤材)로 진중하는 이유는, 오로지 이 유연성을 취함이다. 반면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 가야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도 어깨가 맞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흑단(黑檀)이나 자단이 귀목이라 해도 이런 것으로 바둑판은 만들지 않는다.
내가 숫제 바둑줄이나 두는 사람 같다. 실토정이지만 내 바둑 솜씨는 겨우 7,8급 -, 바둑이라기보다 이건 꼰이다.
비록 7, 8급이라 하나 바둑판이며 돌에 대한 내 식견은 만만치 않다. 흰 돌을 손으로 만져보아서 그 산지와 등급을 알아낸다고 하면 다한 말이다. 멕시코의 1급품은 히우가<日向>의 2등급보다도 값이 눅다. 이런 천재적인 기능을 책이나 읽어서 얻은 지식으로 대접한다면 좀 섭섭하다.
각설 - 가야반 1급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이란 것이 있다. 용재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1급과 다르다는 것은 아닌데,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1급이 8, 9백 원에서 천 원(돌은 따로하고) - 특급은 1천 2, 3백 원 - .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는 게 아니라 되려 비싸진다는 데, 진진한 흥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치 않은 불측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1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갈라진 균열 사이로 먼지나 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단속이다).
1년, 이태 -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동안 상처났던 바둑판은 제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대대로 유착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흔적만이 남는다.
가야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 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힘으로 다시 유착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란 특질을 실지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증명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한 불구병신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도리어 한 급이 올라 '특급품' 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다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과실에 대하여 관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과실은 예찬하거나 장려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치 않는다" 고 양언(揚言)할 것이냐? 공인된 어느 인격, 어떤 학식, 지위에서도 그것을 보장할 근거는 찾아내지 못한다.
어느 의미로는 인간의 일생을 과실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접시 하나, 화분 하나를 깨뜨린 작은 과실에서, 일생을 진창에 파묻어 버리는 과실에 이르기 까지. 여기에도 천차만별의 구별이 있다. 직책상의 과실이나 명리에 관련된 과실은 보상할 방법과 기회가 있을지나, 인간 세상에는 그렇지 못할 과실도 있다. 교통 사고로 해서 육체를 훼손했다거나, 잘못으로 사람을 죽였다거나......
그러나 내 얘기는 그런 과실을 두고가 아니다.
애정 윤리의 일탈(逸脫)......애정의 불규칙 동사......애정이 저지른 과실로 해서 뉘우침과 쓰라림의 십자가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가려는 이가 내 아는 범위만으로 한둘이 아니다. 어느 생활 어느 환경 속에도 카츄샤가 있고 나다니엘 호손의 <<비문자(榧文字)>>의 주인공은 있을 수 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 개개의 인품과 교양, 기질에 따라서 그 십자가에 경중의 차가 있다는 것 뿐이다.
- 남편은 밤이 늦도록 사랑에서 바둑을 두고 노는 버룻이 있었다. 그 사랑에는 남편의 친구들이 여럿 모여 있다. 그 중 하나가 슬쩍 자리를 비켜서 부인이 잠들어 있는 내실로 간 것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부인은 모기장을 들고 들어온 사내를 남편인줄만 알았다...... 그 부인은 그 날로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근접을 허락지 않았다. 10여 일을 그렇게 하다가 고스란히 굶어서 죽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추지 않으려 하면서 예를 하나 들어본다. 십수 년 전에 통연에 있었던 실황이다(입을 다문 채 일체 설명없이 그 부인은 죽었다는데 어느 경로로 어떻게 이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준엄하게, 이렇게 극단의 방법으로 하나의 과실을 목숨과 바꾸어서 즉결 처리해 버린 그 과단, 그 추상같은 열일(秋霜烈日)의 의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의를 표할 뿐이다. 여기는 이론도 주석도 필요치 않다. 어느 범부가 이 용기를 따르랴! 더욱이나 요지음 세태에 있어서 이런 이야기는 옷깃을 가다듬게 하는 청량수요 방부제이다.
백 번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 하나의 여백을 남겨 두고 싶다. 과실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가 있다 하여 그것을 탓하고 나누랄 자는 누구인가? 물론 여기도 확연히 나누어져야 할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제 과실을 제 스스로 미봉하고 변호해 가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목숨을 누리는 자와, 과실의 생채기에 피를 흘리면서 뉘우침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와 - .
전자를 두고는 문제삼을 것이 없다. 후자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이란 절대다. 이 죽음 앞에는 해결 못할 죄과가 없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여백 -, 1급품 위에다 특급이란 예외를 인정하고 싶다.
남의 나라에서는 채털레이즘이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로렌스, 스탕달과는 인연 없는 - 백년, 2백년 전의 윤리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새 것과 낡은 것 사이를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 쪽의 가부론이 아니다. 그러한 공백시대인데도 애정 윤리에 대한 관객석의 비판만은 언제나 추상같이 날카롭고 가혹하다.
전쟁이 빚어낸 비극 속에서도 호소할 길이 없는 가장 큰 비극은 죽음으로 해서 혹은 납치로 해서 사랑하고 의지했던 이를 잃은 그 슬픔이다. 전쟁은 왜 하는거냐? '내국토와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 내 국토는 왜 지키는 거냐? 왜 자유는 있어야 하느냐??......'아내와 지아비가 서로 의지하고, 자식과 부모가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떳떳하게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 이다. 그 보람, 그 사랑의 밑뿌리를 잃은 전화(戰禍)의 희생자들......,극단으로 말하자면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그 희생이 바로 당사자에게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은 남편이, 죽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락을 운운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의 굶주림,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節操)와 용기는 백 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 하기로서니 그 도의 하나만이 유일무이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어느 거리에서 친구의 부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부군은 사변의 희생자로 납치된 채 생금 생사를 모른다. 거리에서 만난 그
부인......만삭까지는 아니라도 남의 눈에 뛸 정도로 배가 부른......그이와 차 한잔을 나누면서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 부인 앞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바둑판의 예화(例話)이다.
과실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 가고 깊어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생활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도 아니다. 제 과실, 제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가야반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1952)
* 김소운;(1908-1981) 부산 영도 출생, 시인, 작가, 번역가.
한국미술선집(일본어역),한국현대문학선집(일본어역),
수필집-삼오당잡필, 건망허망, 물 한 그릇의 행복,
밑 없는 항아리, 맨발의 인생행로, 외 다수
작가의 인간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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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급 품
金 素 雲 *
일어로 '가야'라는 나무- 자전에는 '비(榧)'라고 했으니 우리말로 비자나무라는 것이 아닐까....... 이 가야로 여섯 치, 게다가 연륜이 고르기만 하면 바둑판으로 그만이다.
오동으로 사방을 짜고 속이 빈- 졸을 놓을 때마다 떵! 떵! 하고 울리는 우리네 바둑판이 아니라, 이건 일본식 바둑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야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2, 3국을 두고 나면 반면이 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동안만 그냥 내버려두면 반면(盤面)은 다시 본대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가야반의 특징이다.
가야를 반재(盤材)로 진중하는 이유는, 오로지 이 유연성을 취함이다. 반면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 가야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도 어깨가 맞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흑단(黑檀)이나 자단이 귀목이라 해도 이런 것으로 바둑판은 만들지 않는다.
내가 숫제 바둑줄이나 두는 사람 같다. 실토정이지만 내 바둑 솜씨는 겨우 7,8급 -, 바둑이라기보다 이건 꼰이다.
비록 7, 8급이라 하나 바둑판이며 돌에 대한 내 식견은 만만치 않다. 흰 돌을 손으로 만져보아서 그 산지와 등급을 알아낸다고 하면 다한 말이다. 멕시코의 1급품은 히우가<日向>의 2등급보다도 값이 눅다. 이런 천재적인 기능을 책이나 읽어서 얻은 지식으로 대접한다면 좀 섭섭하다.
각설 - 가야반 1급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이란 것이 있다. 용재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1급과 다르다는 것은 아닌데,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1급이 8, 9백 원에서 천 원(돌은 따로하고) - 특급은 1천 2, 3백 원 - .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는 게 아니라 되려 비싸진다는 데, 진진한 흥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치 않은 불측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1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갈라진 균열 사이로 먼지나 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단속이다).
1년, 이태 -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동안 상처났던 바둑판은 제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대대로 유착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흔적만이 남는다.
가야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 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힘으로 다시 유착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란 특질을 실지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증명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한 불구병신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도리어 한 급이 올라 '특급품' 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다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과실에 대하여 관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과실은 예찬하거나 장려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치 않는다" 고 양언(揚言)할 것이냐? 공인된 어느 인격, 어떤 학식, 지위에서도 그것을 보장할 근거는 찾아내지 못한다.
어느 의미로는 인간의 일생을 과실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접시 하나, 화분 하나를 깨뜨린 작은 과실에서, 일생을 진창에 파묻어 버리는 과실에 이르기 까지. 여기에도 천차만별의 구별이 있다. 직책상의 과실이나 명리에 관련된 과실은 보상할 방법과 기회가 있을지나, 인간 세상에는 그렇지 못할 과실도 있다. 교통 사고로 해서 육체를 훼손했다거나, 잘못으로 사람을 죽였다거나......
그러나 내 얘기는 그런 과실을 두고가 아니다.
애정 윤리의 일탈(逸脫)......애정의 불규칙 동사......애정이 저지른 과실로 해서 뉘우침과 쓰라림의 십자가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가려는 이가 내 아는 범위만으로 한둘이 아니다. 어느 생활 어느 환경 속에도 카츄샤가 있고 나다니엘 호손의 <<비문자(榧文字)>>의 주인공은 있을 수 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 개개의 인품과 교양, 기질에 따라서 그 십자가에 경중의 차가 있다는 것 뿐이다.
- 남편은 밤이 늦도록 사랑에서 바둑을 두고 노는 버룻이 있었다. 그 사랑에는 남편의 친구들이 여럿 모여 있다. 그 중 하나가 슬쩍 자리를 비켜서 부인이 잠들어 있는 내실로 간 것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부인은 모기장을 들고 들어온 사내를 남편인줄만 알았다...... 그 부인은 그 날로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근접을 허락지 않았다. 10여 일을 그렇게 하다가 고스란히 굶어서 죽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추지 않으려 하면서 예를 하나 들어본다. 십수 년 전에 통연에 있었던 실황이다(입을 다문 채 일체 설명없이 그 부인은 죽었다는데 어느 경로로 어떻게 이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준엄하게, 이렇게 극단의 방법으로 하나의 과실을 목숨과 바꾸어서 즉결 처리해 버린 그 과단, 그 추상같은 열일(秋霜烈日)의 의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의를 표할 뿐이다. 여기는 이론도 주석도 필요치 않다. 어느 범부가 이 용기를 따르랴! 더욱이나 요지음 세태에 있어서 이런 이야기는 옷깃을 가다듬게 하는 청량수요 방부제이다.
백 번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 하나의 여백을 남겨 두고 싶다. 과실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가 있다 하여 그것을 탓하고 나누랄 자는 누구인가? 물론 여기도 확연히 나누어져야 할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제 과실을 제 스스로 미봉하고 변호해 가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목숨을 누리는 자와, 과실의 생채기에 피를 흘리면서 뉘우침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와 - .
전자를 두고는 문제삼을 것이 없다. 후자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이란 절대다. 이 죽음 앞에는 해결 못할 죄과가 없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여백 -, 1급품 위에다 특급이란 예외를 인정하고 싶다.
남의 나라에서는 채털레이즘이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로렌스, 스탕달과는 인연 없는 - 백년, 2백년 전의 윤리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새 것과 낡은 것 사이를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 쪽의 가부론이 아니다. 그러한 공백시대인데도 애정 윤리에 대한 관객석의 비판만은 언제나 추상같이 날카롭고 가혹하다.
전쟁이 빚어낸 비극 속에서도 호소할 길이 없는 가장 큰 비극은 죽음으로 해서 혹은 납치로 해서 사랑하고 의지했던 이를 잃은 그 슬픔이다. 전쟁은 왜 하는거냐? '내국토와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 내 국토는 왜 지키는 거냐? 왜 자유는 있어야 하느냐??......'아내와 지아비가 서로 의지하고, 자식과 부모가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떳떳하게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 이다. 그 보람, 그 사랑의 밑뿌리를 잃은 전화(戰禍)의 희생자들......,극단으로 말하자면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그 희생이 바로 당사자에게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은 남편이, 죽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락을 운운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의 굶주림,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節操)와 용기는 백 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 하기로서니 그 도의 하나만이 유일무이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어느 거리에서 친구의 부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부군은 사변의 희생자로 납치된 채 생금 생사를 모른다. 거리에서 만난 그
부인......만삭까지는 아니라도 남의 눈에 뛸 정도로 배가 부른......그이와 차 한잔을 나누면서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 부인 앞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바둑판의 예화(例話)이다.
과실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 가고 깊어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생활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도 아니다. 제 과실, 제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가야반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1952)
* 김소운;(1908-1981) 부산 영도 출생, 시인, 작가, 번역가.
한국미술선집(일본어역),한국현대문학선집(일본어역),
수필집-삼오당잡필, 건망허망, 물 한 그릇의 행복,
밑 없는 항아리, 맨발의 인생행로,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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