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칼럼
내용
우리의 고향, 바다를 위하여
예전 어느 날 해운대 동백섬에 앉아서 종일 바다를 바라본 일이 있었다. 바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그 빛을 바꾸고 있었다. 비취빛 푸른빛색에서 잉크빛 파란색으로 그리고 은빛 꽃비늘로, 한시라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는 게 세상의 원리라는 가르침을 일러 주듯이. 그 너른 품사위로 거대한 화물선들이 쪽배 같은 모습으로 지나다녀도 바다는 너그러이 괘념치 않으면서 카멜레온처럼 시간별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바다를 그리면 파란 칠만 해대던 유년의 감성으로는 적지 않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는 그 바다가 좋아서 부산에 수년을 살다가 부산을 이별하였다가 다시 바다 마을로 돌아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다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 이수익은 떠나간 아버지를 그리는 싯귀 속(結氷의 아버지)에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나를 품고 추위를 막아주던 예닐곱 살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아버지, 아버지...” 그리움이 다다르는 곳, 거기는 모든 곳의 종착지점인 바다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장모님의 시신을 뿌려드린 곳도 바로 저 동백섬 앞바다였다. 장모님은 바다로 화신되어서 어느 해저 마을의 아파트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고 계시리.
식구들과 더불어 남국의 바다로 간 적이 있었다. 우리의 바다보다도 더 좋을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남국의 산호가루가 빚어낸 해변은 정취가 있었다. 햇볕이 따거워도 뜨겁지 않은 모래는 일광욕을 하기에도 적합하였고 이국적인 야자나무들도 평화로웠다. 다음 날 스노쿨링을 하면서 바다 속을 탐험하다가 바다가 병들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바다의 죽음, 그것은 사실로 보였다.
나는 우리의 바다 속을 본 일이 없었다. 그곳의 바다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해안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거진 산호초와 그 속을 헤집고 다니는 작은 고기떼들을 상상하였었건만 그 바다 속에는 백화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고기들이 간간히 노닐고 듬성듬성 해초뿐 황량한 모습이었다. 이래서 사막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라는 현상을 실감하면서, 그런걸 보여주면서 수십 불을 후려내는 상혼이 야속하였다. 해마다 적조의 내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으며 사는 우리의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였다.
밤바다 낚시의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십수 년 전 거제도에 밤낚시를 갔던 기억은 언제나 쓴 웃음을 짓게 한다. 그 날, 밤바다 낚시를 해본 일이 없던 나는 상당한 기대를 하였고 방파제에 그럴듯한 꾼같이 낚시를 드리우고 몇 시간을 보냈는데, 그 바닷물이 웬일인지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밤새도록 고기는커녕 입질도 없이 새벽이 왔다. 어슴프레 밝아온 그 바다의 모습에 나는 정말로 경악하였다. 내가 드리웠던 그 바다는 온갖 오물의 쓰레기가 덮고 있는, 물 반 쓰레기 반인 장소였다. 어두운 탓에 출렁거리는 물소리만 듣고 낚시를 드린 탓이다. 오들오들 떨면서 일행이 낚은 고기는 손가락만한 고기가 두어 마리가 전부였다. 쓰레기더미의 플랭크톤이 밤새도록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염이란 게 무슨 말인지 설명이 필요없었다.
바다를 더럽히는 오염원의 80%가 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던가. 생활오수, 음식쓰레기, 분뇨, 비료, 농약, 어선들의 폐유, 어구의 폐기, 선박수리 폐기물, 크게는 난파유조선까지 모두 인재로 인한 것들이다. 기름을 둘러쓰고 죽어가는 바닷새들의 장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가까운 포구에 가면 바닷가의 오염 실태는 쉽게 눈에 뜨인다. 바다가 깨끗해야 우리가 산다는 사실은 너무도 진한 상식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원래가 바다 출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그 고향을 잊지 못하여 소금물로 체액을 유지하고 있다. 고향인 바다는 10-45%의 염분농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태가 성장하는 자궁 속은 어떤가. 둥둥 물위에 떠서 10개월을 살다가 땅으로 나오지 않는가.
우리의 고향은 물이다. 그래서 시인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물로 환원시킨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고향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미지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고향에 좋은 누각을 짓고 어르신들에게 선물을 하는 미덕을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생각해 본다. 바실련이라는 바다 살리기 시민단체도 있고 정부의 노력도 있기는 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런 운동을 위한 기본이 한 사람 각자들에게 달려 있음을 잊어선 아니 된다. 나의 대소변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의 음식찌꺼기가 어디로 가는가, 그것만 잘 챙기는 의식이 깨어 있으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된다.
산에 오르면 “아니 오른 듯 다녀 가소서” 하는 글을 보게 된다. 이 지구촌에 살다가 가면서 아니온 듯 살다 가면 만사가 해결이다.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가는 생활을 실천하는 게 바로 뉴밀레니엄 시대의 의식이어야 한다.
(MBC 좋은 아침 좋은 얘기 030531)
예전 어느 날 해운대 동백섬에 앉아서 종일 바다를 바라본 일이 있었다. 바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그 빛을 바꾸고 있었다. 비취빛 푸른빛색에서 잉크빛 파란색으로 그리고 은빛 꽃비늘로, 한시라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는 게 세상의 원리라는 가르침을 일러 주듯이. 그 너른 품사위로 거대한 화물선들이 쪽배 같은 모습으로 지나다녀도 바다는 너그러이 괘념치 않으면서 카멜레온처럼 시간별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바다를 그리면 파란 칠만 해대던 유년의 감성으로는 적지 않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는 그 바다가 좋아서 부산에 수년을 살다가 부산을 이별하였다가 다시 바다 마을로 돌아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다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 이수익은 떠나간 아버지를 그리는 싯귀 속(結氷의 아버지)에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나를 품고 추위를 막아주던 예닐곱 살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아버지, 아버지...” 그리움이 다다르는 곳, 거기는 모든 곳의 종착지점인 바다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장모님의 시신을 뿌려드린 곳도 바로 저 동백섬 앞바다였다. 장모님은 바다로 화신되어서 어느 해저 마을의 아파트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고 계시리.
식구들과 더불어 남국의 바다로 간 적이 있었다. 우리의 바다보다도 더 좋을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남국의 산호가루가 빚어낸 해변은 정취가 있었다. 햇볕이 따거워도 뜨겁지 않은 모래는 일광욕을 하기에도 적합하였고 이국적인 야자나무들도 평화로웠다. 다음 날 스노쿨링을 하면서 바다 속을 탐험하다가 바다가 병들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바다의 죽음, 그것은 사실로 보였다.
나는 우리의 바다 속을 본 일이 없었다. 그곳의 바다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해안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거진 산호초와 그 속을 헤집고 다니는 작은 고기떼들을 상상하였었건만 그 바다 속에는 백화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고기들이 간간히 노닐고 듬성듬성 해초뿐 황량한 모습이었다. 이래서 사막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라는 현상을 실감하면서, 그런걸 보여주면서 수십 불을 후려내는 상혼이 야속하였다. 해마다 적조의 내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으며 사는 우리의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였다.
밤바다 낚시의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십수 년 전 거제도에 밤낚시를 갔던 기억은 언제나 쓴 웃음을 짓게 한다. 그 날, 밤바다 낚시를 해본 일이 없던 나는 상당한 기대를 하였고 방파제에 그럴듯한 꾼같이 낚시를 드리우고 몇 시간을 보냈는데, 그 바닷물이 웬일인지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밤새도록 고기는커녕 입질도 없이 새벽이 왔다. 어슴프레 밝아온 그 바다의 모습에 나는 정말로 경악하였다. 내가 드리웠던 그 바다는 온갖 오물의 쓰레기가 덮고 있는, 물 반 쓰레기 반인 장소였다. 어두운 탓에 출렁거리는 물소리만 듣고 낚시를 드린 탓이다. 오들오들 떨면서 일행이 낚은 고기는 손가락만한 고기가 두어 마리가 전부였다. 쓰레기더미의 플랭크톤이 밤새도록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염이란 게 무슨 말인지 설명이 필요없었다.
바다를 더럽히는 오염원의 80%가 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던가. 생활오수, 음식쓰레기, 분뇨, 비료, 농약, 어선들의 폐유, 어구의 폐기, 선박수리 폐기물, 크게는 난파유조선까지 모두 인재로 인한 것들이다. 기름을 둘러쓰고 죽어가는 바닷새들의 장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가까운 포구에 가면 바닷가의 오염 실태는 쉽게 눈에 뜨인다. 바다가 깨끗해야 우리가 산다는 사실은 너무도 진한 상식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원래가 바다 출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그 고향을 잊지 못하여 소금물로 체액을 유지하고 있다. 고향인 바다는 10-45%의 염분농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태가 성장하는 자궁 속은 어떤가. 둥둥 물위에 떠서 10개월을 살다가 땅으로 나오지 않는가.
우리의 고향은 물이다. 그래서 시인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물로 환원시킨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고향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미지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고향에 좋은 누각을 짓고 어르신들에게 선물을 하는 미덕을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생각해 본다. 바실련이라는 바다 살리기 시민단체도 있고 정부의 노력도 있기는 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런 운동을 위한 기본이 한 사람 각자들에게 달려 있음을 잊어선 아니 된다. 나의 대소변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의 음식찌꺼기가 어디로 가는가, 그것만 잘 챙기는 의식이 깨어 있으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된다.
산에 오르면 “아니 오른 듯 다녀 가소서” 하는 글을 보게 된다. 이 지구촌에 살다가 가면서 아니온 듯 살다 가면 만사가 해결이다.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가는 생활을 실천하는 게 바로 뉴밀레니엄 시대의 의식이어야 한다.
(MBC 좋은 아침 좋은 얘기 0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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